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

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서서 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

장석주, 「대추한알」 中

도화헌은 느리고 정적이다. 꾸밈이 없고 소박하다. 복잡하고 빠르게만 흘러가는 일상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표정으로 드러난다. 오히려 지금의 일상의 모습을 조롱하듯 여유를 가지라고 무언의 손짓을 한다. 지친 영혼을 달래주고 안식처가 되어 살포시 기댈 수 있는 공간이었다. 물론 이런 내용이 도화헌의 모든 가치를 대변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지난 몇 달 동안 서울과 도화헌을 오가며 느낀 소박한 단상이다.

도화헌에서 중요한건 어떤 새로운 작업이었다. 주어진 프로그램에 맞추어 일정한 성과와 결과물이 필요했고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작업 보다는 약간의 일탈이 필요했다. 그저 멍하게 앉자 명상을 하거나 책을 읽고, 주변을 산책하고, 낮선 사람들을 만났다. 해질 무렵 시작되는 술 한잔과 여러 담론의 순간은 모든 걸 잊고 고스란히 녹아드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음악이 흐르는 별이 빛나는 밤하늘이었다.

이번 작업은 장석주의 ‘대추한알’이라는 시 내용을 접하고 시작되었다. 첫 문장은 의미심장하다.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는 것처럼 하나의 대상이 화가의 눈에는 과연 어떻게 보이는 것인지. 동양에는 겸재가 그랬고 서양에는 세잔이 그랬다. 그 이면에는 경험과 체득이 중요했다. 끈임 없는 열정의 단면이었다. 결국 고무줄처럼 줄이고 늘리는 선택의 폭을 넓혀가는 그 지점이었다. 그래서 어떤 한 대상의 장소를 설정하고 무언의 대화를 시작했고 해석한 결과물이다. 무심코 지날 수 있는 어떤 대상의 대한 표정과 사유의 가치를 다시 곱씹어 보는 계기가 되었고 어떤 결론을 규정하기 보다는 그 과정 속에서 노니는 순간의 흔적이었다.